본문 바로가기

사천이야기

송포동(松圃洞)

  본시는 진주군 남양면 지역이었다. 광무10년(1906)에 고성군으로 이속되었다가 1912년에 사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남양면 선전. 송천. 광포동. 문화 각 일부를 통폐합하여 송포리라 하였다. 1956년에는 삼천포시로 편입되어 송포동으로 개칭되었다.

  ◈가는골 : 사촌 앞들에 있는 논
  ◈가바랑내 : 사촌 남쪽에 있는 내
  ◈가운데땀 : 중촌 송포동 가운데 있는 마을
  ◈광 포 : 송포동 동남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
  ◈구녕바우 : 형제바위 서쪽에 있는 바위. 구멍이 뚫어져 있음.
  ◈구미(龜尾) : 송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 거북같이 생긴 산의 꼬리에 있음.
  ◈남양교(南陽橋) : 돌천내에 있는 다리.폭 6m, 길이 20m.
  ◈달래끝 : 월천포. 모충공원 북쪽에 있는 개
  ◈동사땀 : 사촌부락
  ◈모사랑개 : 모자랑개
  ◈솔배들 : 송천 앞 들
  ◈선밭들 : 송천 뒷 들
  ◈모자랑개(毛자郞개) : 선진부락 서쪽에 있는 개. 강변에 모래와 띠가 많았으며,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포진한 곳으로 모자랑개 앞바다에서 많은 왜군을 격퇴시켰으며 적의 화살을 어깨에 맞고 치료한 곳이라고 함.
  ◈모충공원(募忠公園) : 달래끝에 있는 공원. 이 근처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적지로 공의 공덕을 추모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53년 4월21일(음, 3월8일) 이순신장군 탄신일에 높이 20자 된는 기념비를 세우고 공원을 열었음. 이곳의 지형이 거북의 등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원의 아래쪽은 잔잔한 강지(康地)바다를 건너는 멀리 사천(泗川)의 선진(船津)이 내려다 보이고 한려수도(閑麗水道)의 물결을 따라 노량(露梁)목이 바라보이는 이곳은 또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의 전적지(戰跡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요 이곳은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인 모자랑포(毛自郞浦)이다.
   일찌기 충무공(忠武公)의 전적지(戰跡地)를 찾아나섰던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이곳에 와 보고 그의 저서(著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기록하기를,
   <삼천포시(三千浦市)의 동북편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와룡산(臥龍山)이요, 그 산의 한가닥이 서쪽으로 내리다가 다시 우뚝 뭉친것이 각산(角山)이요, 그 산 남쪽이 삼천포다.
   그리고 산 서북쪽은 남양평야(南陽平野)와 강지(康池)바다라고 부르는 고적어린 바다인데 각산의 한가닥이 이 강지바다의 한 모퉁이로 돌출하여 마치 거북과 같으므로 그것을 거북등이라 부른다. 이 거북등 바로 밑이 충무공기록중에 보이는 모자랑포(毛自郞浦) 그것이니 충무공의 제2차 해전(海戰)인 당포해전(唐浦海戰)의 서막(序幕)이었던 사천해전(泗川海戰)이 바로 여기서 벌어졌던 것이다. 거북등은 이와같이 연고깊은 것이기 때문에 해방후에 이곳 박종실(朴宗實)씨 등 많은 인사들이 여기에 추모의 기념비를 세우자고 의논하고 1951년 11월 19일에 기공하여 52년 3월 8일에 준공하였다.
   *초석높이 3척 6촌, 앞넓이 9척, 옆길이 7척 5촌
   *중대석높이 2척 2촌, 앞넓이 5척 1촌, 옆길이 3척 1촌
   *비석높이 7척 6촌, 넓이 3척 6촌, 두께 1척 4촌
   이상은 노산 이은상이 적은 모충공원(慕忠公園)의 성웅 이순신 공덕기념비에 대한 해설이며 동시에 모충공원(慕忠公園)의 설명도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한 것이 된다.
   여기에 그 비문(碑文)을 옮겨두거니와 비문은 소오(小悟) 설의식(薛義植)이 짓고 이화여고(梨花女高)생 김형순(金亨淳)이 비문을 썼다.
   <<비 문(碑文)>>
   여기는 사천땅 달래끝 거북등이요 보이는 물목은 바로 모자랑개니 임진왜란때 백전백승한 성웅 이순신어른께서 두번째로 일어섰던 당포(唐浦)해전의 싸움터다.
   투함(거북선)이 처음부터 등장한 것도 이 싸움이었고 몸소 진두에 나서서 적탄에 피를 흘리신 것도 이 언저리였으니 이 바다의 이구비 저구비에는 이같은 전공이 스민 곳이다.
   성웅의 일생은 청사의 기록이 뚜렷하고 겨레의 구천이 생생하거니와 인종원년에 나시어 선조 삼십일년에 전몰하시기까지 쉰네해의 한위를 바치여 걸으신 구국의 길에는 어느 고비 하나에도 순탄한 마디가 없었으니 그러기에 자욱마다 혈적이었다. 옳고 바른것만 지키어 스스로 우뚝하였던 성웅은 그러므로 하여서 더욱 더 불의와 패도의 미둠을 받아 서른 두살에야 비로소 함경도 두멧골 권관이 되었고 그 뒤로 내리 십수년동안 심술궂은 상관들의 흙작질 밑에서 남북 변두리의 가시덤불을 밟다가 마흔일곱에 겨우 올바른 자리의 한모를 맡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니 때는 임진 전해인 신묘년 이월이었다.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 올것을 미리 짐작한 이수사는 도임하는 그날부터 군력을 기르고 병비를 다듬어 임진년난의 전공으로 정이품 정헌대부에 승직되고 다음해 계사년에는 삼도수군 통제사를 겸하시어 생업까지를 크게 떨쳤으나 지위와 공적을 시기하는 악도의 질투와 음해애 왜적의 흉계마저 덮치어 마침내 정유년 이월 원통한 죄목에 끌리고 말았다. 땅이 꺼져라 발을 굴르는 백성의 호곡에 하늘도 알음있어 아슬아슬한 순간에서 목숨을 얻었으나 관직을 빼앗긴 일개의 무인으로서 도원수 군영ㅇ에 종군하는 몸이 되었고 옥고도 풀리지 못한 쓰거운 이길에서 어머님을 여의어 겹쳐진 죄인생활을 치루는 동안에 정유재란이 벌어져 이해 칠월에 우리 수군은 원균의 통제밑에서 탕진되고 말았다. 이 뒤를 이어 다시 통제사의 직책을 맡으신 성웅은 허물어진 폐허 위에서 장병 일백스무명과 병선 열두척을 간신히 모았으나 그 몸 전체가 나라를 지탱하는 쇠기둥이요. 그 마음 전부가 겨레를 비추는 횃불인 이 어른은 상유십이(尙有十二)를 일컬은 대기백과 미신불사(微臣不死)를 왜치신 대 신념으로 삼백삼십의 적선과 마주쳐 울돌목싸움의 기적을 창조하셨다. 다음해 무술년 이월에 고금도(古今島)를 개척하여 군세를 재흥시키고 이해 십이월에 마지막 큰 싸움을 단행하여 적병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놓고 대장선 위에서 북채를 잡은채 고요히 돌아가셨으니 때는 바야흐로 십구일색샐이었다. 몸을 죽여서 나라를 살리신 이통제는 꾸준한 예비심과 치밀한 조직력, 그 넓은 포용성과 드세인 통어책으로 보천욕일(補天浴日)의 대공을 세웠거니와 천생으로 문무를 겸하고 지용을 겸하고 충효를 겸하여 비치니 않음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민족의 태양이신 것이다. 오늘도 어제같이 물결치는 바다 북편은 적선을 함몰시키던 사천 선창이요. 멀리 서쪽으로 점점한 구름밑은 신망국활(身亡國活)의 빛내던 노량목 관음포(觀音浦) 어구다. 지나간 오천년을 거슬러 살피고 닥아올 무궁대를 앞질러 생각할 때 이나라 이강토에 풍긴 성웅의 얼과 넋은 겨레의 생명과 더불어 길이 억만대대에 흥겨워 뛸것이다.
   단기 사천이백팔십오년 음 십이월십구일 순창후인(淳昌候人) 설의식 삼가 짓고 이화여고 소녀 김형순 삼가 씀.
  ◈장좌곡 : 모충공원 기념비가 서 있는 곳에서 서북간. 옛날에 이것에서 강지바다를 한 눈에 관망할 수 있는 일종의 초소의 역활을 하였음.
  ◈굴 곡 : 모충공원 기념비에서 노량목을 보고 있는 등성이
  ◈무지개새미 : 기념비에서 정동쪽에 있던 샘. 지금은 메워졌음.
  ◈덕 곡 : 모충공원 입구 등성이
  ◈사촌(舍村) : 동사땀. 새땀. 송천 남쪽에 있는 마을. 동사무소가 있었음.
  ◈사촌새마을회관 : 숙종 15년 고성에 의검부 본청을 두고, 이곳은 지부로 사용하였음. 한일합병후 남양면 사무소와, 주재소로 사용하였으며 해방후 송포동 1구 사무소로 사용됨.
  ◈새 땀 : 신송(新松)
  ◈서지몰 : 선전마을
  ◈선전(仙田) : 송천 북서쪽에 있는 마을. 서재가 있었다고 함. 전답이 비옥함.
  ◈송천(松川) : 아래땀. 속포동에서 으뜸되는 마을. 소나무가 많아 내를 이루었다고 함.
  ◈시리등 : 시루바위 아래쪽 등성이 마을
  ◈시리바우 : 광포 마을 동쪽에 있는 바위. 시루처럼 생겼음.
  ◈월천포(月川浦) : 달래끝
  ◈중촌(中村) : 가운데땀
  ◈죽림역(竹林驛) : 송포동에 있는 진삼선(晋三線)의 역자리
  ◈짱구널 : 선밭 밑에 있는 들
  ◈팔형제바우 : 호랑바위 옆에 있는 바위. 바위 밑에 묘를 써서 8형제를 낳았다고 함.
  ◈거북등 : 충무동 앞에 있는 등성이. 거북처럼 생겼으며 임진왜란때 여기에 초소를 두고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출동 때. 북쪽인 사천군 선진에 있는 적을 서쪽 강지 바다로 유인하여 왜적선 12척을 전멸시켜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하였다고 함.
  ◈형제바우 : 송천 앞에 있는 바위. 형제처럼 둘이 서 있음.
  ◈호랑바우 : 구녕바위 서쪽에 있는 바위
  ◈말바우 : 갈산농원 뒤 왼쪽에 있는 길다란 바위
  ◈낭창곡 : 모충사에서 북쪽에 있는 골짜기
  ◈낙토바우 : 모충공원에서 북쪽에 있는 바위
  ◈망전암 : 모충공원 최 북쪽
  ◈베늘봉 : 모충공원 서쪽
  ◈지새밭골 : 광포마을에서 동쪽. 현재 화장장이 있음.
  ◈풍상등 : 지새밭골에서 북쪽
  ◈안재밭골 : 풍상등에서 북쪽
  ◈된 등 : 안재밭골에서 북쪽
  ◈호박논고랑 : 된등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북숭모리 : 호박논고랑에서 올라오는 등성이
  ◈주산등 : 복숭모리 올라오는 등성이
  ◈갓 골 : 주산등에서 내려가는 골짜기
  ◈홍아원 : 남양출장소 옆에 있는 농장

'사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현면(龍見面)  (0) 2009.11.18
사천읍(泗川邑)  (0) 2009.11.18
죽림동(竹林洞)  (0) 2009.11.18
대포동(大圃洞)  (0) 2009.11.18
노룡동(魯龍洞)  (0) 2009.11.18